[뉴필로소퍼]Feature 관점을 바꾸면 다르게 보인다

'관점을 바꾸면 다르게 보인다'

올리버 버크먼 (작가)


* 이 글은 뉴필로소퍼 14호 <인식의 세게, 인식 너머의 세계> 중 

  아티클 '관점을 바꾸면 다르게 보인다!'를 부분 수정하여 발췌한 것입니다.



세상이 갈수록 암울해지는 듯한 요즘, 나는 종종 암석 해안에서 세찬 파도를 잠잠히 견디는 바위들을 마음속으로 그려 본다. 어디에 있다고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는 외딴곳에 분명 그 바위들이 있을 것이다. 그 바위들은 아주 오랜 세월 동안 그 자리를 지켰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곳에 서서 세상을 바라보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차분해진다. 팬데믹은 물론, 일상의 큰 변화들도 내 마음을 흐트러트리지 못한다. 바위의 관점에서 보면 ‘나 하나’가 티끌만한 삶 속에서 느끼는 짜증과 불안은 너무나도 하찮아져서, 그런 게 언제 중요했었냐는 듯 웃어넘기게 된다. 내가 걱정과 분노, 두려움에 빠져 날마다 허우적대는 동안 바위는 세상의 변화에 초연한 자태로 꿋꿋이 제자리를 지킨다.


내가 상상 속 바위를 떠올리는 것은 평정심을 찾기 위해 관점을 바꿔 보는 기나긴 전통의 한 갈래라고 할 수 있다. 관점을 바꿔 보자는 메시지는 리처드 칼슨이 《우리는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건다》에서 자세히 다뤘는데 “온 우주를 포용하고, 영원한 시간을 헤아리고, 모든 것의 빠른 변화를 생각하고, 탄생부터 죽음까지의 덧없음을 알라”고 말한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말에 기원을 두고 있다. 마르쿠스의 말에서 분명히 알 수 있듯이, 관점 바꾸기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인식을 동시에 변화시키는 일이다. 우리는 우주라는 공간 속에서 작디작은 존재일 뿐이다. 또 우리 일생은 인류가 지나온 시간 속에서 눈 한 번 깜빡이면 사라질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그마저도 인류 문명의 역사는 지구 역사에서 아주 작은 비중밖에 차지하지 못한다.


관점을 바꾸었을 때 생기는 장점은 평정심만이 아니다. 일상의 관점에서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조금 더 창의적으로 변하게 된다. 코미디언 조지 칼린이 ‘뷰자데vujadé*’라고 표현한, 익숙함 속의 낯섦과 맞닥뜨리는 순간, 우리는 문제의 해답을 조금 더 쉽게 발견할 수 있다. 2014년 경영학자 제니퍼 뮬러와 동료 학자들이 내놓은 연구 결과에 따르면, 사람들은 자기 주변이 아니라 먼 곳에서 만들어진 아이디어를 더 참신하게 여긴다. 연구진은 발 모양에 맞춰 스스로 변형하는 나노 기술 운동화를 만들면 어떨지 실험 참가자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참가자들은 그 운동화가 먼 곳에서 발명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만 독창적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이유를 짐작해 보자면, 아마도 멀찍이 거리를 두고 보면 전체 윤곽이 한눈에 들어와 대상의 가치에 집중할 수 있는 데 반해, 너무 가까이서 보면 깐깐하게 잣대를 들이밀며 괜히 딴지를 걸기 때문일 것이다.

* 데자뷰déjavu를 거꾸로 쓴 조어로, 익숙한 상황이지만 낯설게 보는 것을 뜻한다.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이 여행하면서 멋진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낯선 여행지에 가면 개인 문제나 업무로부터 정신적 거리를 두기가 쉽고, 그 덕에 진짜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게 된다. 여행 다니기가 어려워진 요즘은 일기를 쓰면서 비슷한 효과를 보고 있다. 고민을 글로 옮겨 적다 보면 제삼자의 눈으로 그걸 바라보게 된다. 그러다 생각지 못했던 해답을 발견할 때도 더러 있다. 하지만 고민하던 문제가 별 게 아니었음을 알게 되는 때가 더 많다. 스위스 심리학자 칼 융도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이러한 사실을 깨달았다. 환자들은 자신의 문제를 전부 해결했기 때문에 괜찮아지는 것이 아니었다.


낮은 곳에 있을 때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격한 갈등과 감정적 동요를 일으키던 것이

높은 산꼭대기에서 굽어보면 골짜기를 지나는 바람쯤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그 문제가 현실에서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저 환자가 문제 한복판이 아니라 그 위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이때 우리는 ‘자기중심적 편향’에서 벗어나게 된다. 본성적으로 인간은 자신과 자신의 문제를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이러한 편향성은 나르시시스트나 과대망상증 환자에게만 나타나는 게 아니다. 지나치게 수줍어하는 사람 또한 자신이 주변 사람들에게 대단한 관심을 받고 있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나 역시 자기중심적 편향에서 벗어나지 못해 때로는 불리한 대화를 피하려 들고, 실패할 것 같은 일을 마다하곤 한다. 내 자존심이 다치는 꼴은 죽어도 못 볼 것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기중심적 편향을 내려놓으면 내가 생각하는 우선순위가 달라지는 것을 안다. 이렇게 우선순위가 바뀌는 경험을 가장 잘 담아내는 말이 바로 ‘조망효과’다. 조망효과는 우주에서 지구를 내려다보는 우주비행사들이 느끼는 감정을 가리킨다. 우주비행사 버즈 올드린은 우주에 덩그러니 놓인 작고 연약한 지구를 보며 “검은 벨벳 하늘에 박혀 빛나는 보석 같다”라고 말했다. 관점을 바꾸는 순간, 지구 안의 국경선은 아무 의미가 없어지고, 전쟁은 비이성적인 자해 행위일 뿐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의 고민거리들이 얼마나 하찮은가를 깨달았다고 해서 반드시 회의주의나 허무주의에 빠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깨달음이 삶에 풍부한 의미를 부여하고 의욕을 불어넣는다.


철학자 이도 란다우는 《불완전한 세상에서 의미 찾기Find Meaning in an Imperfect World》에서 그 이유를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흔히 사람들은 원대한 일을 이뤄야만 의미 있는 삶이라고 생각한다. 스티브 잡스의 말처럼 “우주에 흔적을 남겨야 한다”고 믿으며, 사정이 여의치 않아 흔적을 남길 수 없으면 의미 있는 삶을 사는 데 실패했다고 여긴다. 하지만 이는 스스로에게 너무 가혹한 잣대를 들이미는 것과 같다. 미켈란젤로나 셰익스피어가 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또 우리가 ‘정말로’ 원대한 업적을 남긴다 한들, 그 흔적이 우주에 남을 리도 없다.


우리는 삶에서 거창한 의미를 발견하려 하지만, 결국 발견하게 될 진실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잣대로 삶을 평가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런 부담감을 내려놓고 나면 마음 편히 다른 잣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예술 작품을 만들고 공동체나 가족을 가꾸는 것처럼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일들로 삶을 평가하는 건 어떨까? 그런 일이 소수의 사람에게만 즐거움과 행복을 주더라도 상관없다. 상상 속 바위는 우리가 처음 그것을 떠올리기 전부터 존재했으며 우리가 사라진 후에도 변함없이 존재할 것이다. 그에 비하면 우리의 일상 속 걱정거리들은 시시하다. 한편으로는 그렇기에 무모한 야심을 펼치고, 위험을 감수하고, 모든 걸 바쳐 살아가도 괜찮다. 어차피 별일이 아닐 테니 말이다. 우리가 뭔가에 실패한다고 해서 이 세상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뉴필로소퍼 14호 인식의 세게, 인식 너머의 세계